희박 개인전 <Plant Life>

당신의 나무 
글 목해경

숲의 어떤 동물들은 숲을 닮아간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먹기 위해서든 먹히지 않기 위해서든. 하지만 그런 변화는 동물만의 것이 아니다. ‘식물의 삶’도 먹기 위해서 그리고, 먹히지 않기 위해서 서로의 모습을 모방하기도 한다.
엄마의 스카프에서 착안한 <Plant Life> 컬러 드로잉 연작은 화려한 색채의 ‘화초’와 ‘새’들이 대비를 이루며 공중 어딘가에 부유하듯 뒤엉켜 있다. 새가 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화초가 날아오르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아가 이것은 서로 뒤엉켜 한데 녹아 흐르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새는 점점 구체적 형상을 잃고 지면으로 흘러내리는 반면, 화초의 잎사귀는 날개처럼 솟아오르며 꿈틀거린다. 종국에는 무엇이 새이고 화초인지 알 수 없이, 하강과 상승의 뒤섞인 이미지만 남는다.

새와 솟아오르는, pen on paper, 21x14.8cm, 2019

날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 자유와 초월에 대한 새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에게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새의 부속인 ‘날개’는 본체인 ‘새’를 압도하며 오히려 본체를 자신에게로 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날개 없는 새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날개는 그 자체로 초월을 향한 상징으로 남는다. 날개가 향하는 곳은 이 땅의 모든 속박된 존재들이 갈망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 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피안(彼岸)의 장소,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하늘이다.
하지만 날개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하늘에 머무를 수는 없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혹은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기 위해서라도 새는 다시 숲으로 내려와야 한다. 지면 아래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는 나무들 사이, 죽이고 먹는 행위가 반복되는 이 지상으로 내려와야만 한다.​​​​​​​​​​​​​​

떨어지는 새, Pen on paper, 14.8x21cm, 2016

신화적 사고에서 대지(혹은 바다)는 풍요를 베푸는 동시에 가혹한 어머니, 마르지 않는 황금의 씨앗, 생명의 자궁(womb)이자 안식의 무덤(tomb) 등으로 상징된다. 모든 생명이 태어난 곳이며 결국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 행성 지구.
이것은 우리가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의 터전은 관점에 따라 삶의 속박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삶에는 어느 정도 늘 ‘도약’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데, 그 기대감은 동시에 ‘안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안정이 곧 삶의 도약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도약이 삶의 안정이라 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표층은 단순해 보일지라도 그 기저의 풍경은 늘 그렇지가 않다. 모순으로 얽혀 있지만 그 안에서도 항상 균형을 찾고 싶어 한다. 뿌리는 더 깊은 땅속으로 내려가 튼튼히 자리를 잡고 싶어 하면서도, 잎과 가지는 빛을 쫓아 더 위로 가려는 식물들처럼.
그래서 나는 인간의 마음을 식물계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식물이 생겨나면 크고 작은 동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양극이란 서로 만날 수 없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교차하여 덧대어진 바큇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굴러간다.
<Plant Life> 컬러 드로잉 연작은, 내면의 풍경들이 서로를 모방하며 생장해가는 유기체의 숲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공중에 부유하는 화초와, 영원할 수 없는 새의 비상은 어딘가 모호한 중간에서 어색하게 정지된 몸짓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화초와 새들은 점점 하나처럼 용해되어 날개 같은 잎사귀, 잎사귀 같은 깃털로 변해간다.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내려오면서, 그것들은 서로 녹아들어 밑으로 흘러내린다.

달과 흘러내리는, Pen on paper, 21x14.8cm, 2017

달과 흘러내리는, Pen on paper, 21x14.8cm, 2017

<달과 흘러내리는 Moon and puring>에서의 달도 색색의 액체를 쏟아내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 된다. 달은 두 개의 얼굴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빛’으로서의 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물(아르테미스, 헤카테, 디아나)’로서의 달이다. <달과 흘러내리는 Moon and puring>에서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동물’처럼 탁한 체액을 쏟아낸다. 체액은 캄캄한 지하를 향해 흘러가고, 색채들은 한데 뒤섞이기 시작한다. 색은 섞을수록 검은색에 가까워진다.

사무치는 갈대, Pen on paper, 14.8x21cm, 2017

검은 물
마음은 때때로 비상에서 추락으로, 나아가 이 풍요롭고 가혹한 지상의 숲에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저 깊은 지하로 흘러 내려가기도 한다. 그곳은 빛도 닿지 않는 어두운 우물,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심연(深淵)이다.
‘색’은 여기에서 더이상 화면을 장악하지 못하고 추방당하거나 ‘검정’의 부속으로서만 존재한다.
작가 본인이 육체와 의지, 모든 게 바닥이라서 단지 시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그렸다는 <부유하는 섬 (Floating Island)> 시리즈. 이 드로잉들의 ‘검정’은 일필휘지로 대담하게 채워 넣은 것이 아니라, 가는 펜선을 하나씩 포개어 쌓아 올린 검은색이다. 희박은 작업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펜들을 다 쓸 때까지만 그리자.
그러면 그때는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겠지.”
손과 팔이 허용하는 최소한의 반경 안에서 가는 선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가까이에서 보면 칼질을 해놓은 것처럼도 보이는 이 불안한 선들은, 검정 뒤에 숨어 조용하지만 위태롭게 진동한다. 그러다 끝내 폭발하거나 파편을 흩날리며 쏟아지기도 한다.

찌르르, Pen on paper, 14.8x21cm, 2017

쏟아진 것들은 계속해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 풀과 나무, 바위가 되거나 뻥 뚫린 동굴이 된다. 하지만 그것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도저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연못이다.
이 검은색의 불안한 ‘선’들은, 결국 검은 ‘물’이 된다. 물은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오직 하강뿐이다. 검은색에 가까운 수면은 우리의 얼굴을 아름다울 정도로 선명하게 비추지만, 그것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선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영영 잊어버리게 된다고.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자는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늪, Pen on paper, 21x14.8cm, 2019

잠수
프리 다이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랑블루 The Big Blue, 1988>에서, 주인공인 잠수부 ‘자크’는 깊은 바다 밑으로 잠수해 내려갈 때마다 계속 그 ‘밑’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어둡고 고요한 바다 밑에 있노라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를 찾는 일이 자기에겐 항상 어려운 일이라고. 마침내 그는 바닷속에서 로프와 장비를 버리고 돌고래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는 죽음이라는 안식을 통해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닷속에 영원히 머물며 바다 그 자체가 된다. 자크는 아름답게 사라지고, 비극은 지상에 남겨진 이들의 몫으로 남는다. 사라진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다시 올라와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항상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숨이 남아 있을 때 올라와야 한다’는 해녀들의 말처럼, 산소와 체력이 남아있지 않으면 올라오지 못한다. 선택도 없이 물밑으로 가라앉고 만다. 그러니 부지런히 남아있는 산소로 버티며 헤엄쳐야 한다.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잠수부들에겐 헤엄쳐야 할 곳을 가리키는 로프가 있다. 내려올 때 로프를 보고 내려왔으니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다. 막막한 바닷속에서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 위도 아래도 바라보지 않고, 수심이 적힌 로프의 ‘정면’만을 응시하면서. 내가 도달하게 될 목적지, 빛이 아른거리는 수면 위를 보게 되면 일종의 기대감과 흥분으로 인해 뇌가 쓸데없이 더 많은 산소를 낭비하게 된다고 한다. 

논눈, Pen on paper, 14.8x21cm, 2017

부활의 나무
잠수부들의 이정표가 가이드 로프라면, 내면을 잠수하는 자들의 이정표는 무엇일까.
카를 융(C. G. Jung)은 일찍이 인간의 내면을, 물리적 우주와 상보 관계에 있는 또 다른 우주라고 생각했으며, 엘리아데는 <샤마니즘>에서 시베리아 샤만이 천계(天界)에 오르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한다고 쓰고 있다. 샤만은 내면에서 천계에 오르며 신과 악마들을 만난 뒤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의 육체는 이 땅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지만, 그는 마음의 우주를 비행하고 돌아온다.
우주에도 ‘길’이 있다. 늙은 샤만은 후계자인 젊은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길’을 전수한다. 길이 있기에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우주를 여행하는 것은 신비롭지만 위험한 여정이다.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기준점이 필요한데, 마음속에도 그런 변치 않는 ‘중심’이 있다. 신화적 사고 전통에서 그 중심(Axis)은 거대한 ‘산’이나 ‘나무’로 표현된다. 이른바 우주산(宇宙山, Cosmic Mountain)과 세계수(世界樹, World Tree)가 그것으로, 몽골계의 부랴트인들은 세계수(Zambu)의 꼭대기에 ‘북극성’이 있다고 믿는다. 오래전부터 북극성은 뱃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이정표였다. 그것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지금 여기’를 알려주는 빛이었으므로.
​​​​​​​마음의 중심이자 영원한 빛을 가리키는 한 그루 나무. 다시 살고자 하는 부활의 이정표. 부활에 대한 모든 신앙은, 봄이면 싹을 틔우는 식물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위나 아래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나무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어둠에서 벗어난다. 벗어나려고 몸짓한다.

오늘도 무사히, Acrylic stencil on canvas, 145.5x112.1cm, 2019

‘정답’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답을 계속해서 광고하는 이 시끄러운 세 상에서, 우리는 매번 길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꼭 기도 같다고 생각한다. 균형을 찾고 싶어 하는 몸짓 같 다고 생각한다. 먹기 위해서, 그리고 먹히지 않기 위해서.
목해경, 2021,02,10
달과 식물 (Moon and plant)
Watercolor, pen on paper, 18x13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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