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_ 윤민화 _ 2020.10.27
전시 <두 개의 산>이 올려지기까지, 약 2년여의 준비 기간 동안 진행된 과정들은 세 개의 단계로 나뉘어 다뤄봄직하다. 첫 번째 단계는 “숲세권-관악산”라는 이름으로 2019년에 진행된 리서치 단계다. 이 단계에서 기획팀 컨템포로컬은 관악산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자연’을 도구화하게 된 여러 배경을 살펴보고, ‘예술 산행’이라 불리는 일들을 조직해 진행했다. 두 번째 단계는 “50일간의 관악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로, <두 개의 산>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각자 ‘반려 식물’을 분양 받아 기르는 시기다. 애초에 작가들과 직접 관악산을 오르는 산행을 계획했던 것과 달리 식물을 각자 기르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방향이 선회하게 된 데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다섯 명의 참여 작가와 두 명의 컨템포로컬 기획팀은 각자 반려식물을 분양 받아 집에 머무르며 식물을 기르는 시기를 보냈다. 마지막 단계는 <두 개의 산> 전시이다. 이 단계는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뿐 아니라 전시 기간 동안 작품의 일부가 되어 전시장에 놓이게 되는 반려 식물들의 생장기 또한 포함해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렇듯 <두 개의 산> 전시를 올리기까지 두 해에 걸쳐 진행된 과정들이 세 단계로 분화되는 스펙트럼을 보이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코로나19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으로 산을 오르고 같이 공기의 소리를 듣고 초록의 색으로 숨쉬고 하늘의 향을 맡길 기대”했었다는 기획자의 글에서 이렇게 기획의 방법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2019년에 진행된 “숲세권-관악산” 리서치 프로젝트가 관악산 인근의 지리적, 환경적, 경제적 조건들에 관한 연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지역성을 기획팀의 정체성으로 내건 공간 운영과 기획 활동 방향을 선명히 드러낸다고 본다. 또한 관악산과 그 인근 지역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자연 환경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과 태도를 예술적 창작의 준거로 삼는 것으로 외연을 넓히는 시도는 ‘컨템포로컬’ 이라는 컨셉에 부응하는 기획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전 리서치 프로젝트에서 관악산이라는 자연 환경을 둘러싼 사회적, 경제적 시대성을 점검하던 태도(“숲세권-관악산”)에서, 집 안의 화분에 심어진 식물과 반려하는 것(“50일간의 관악산”)으로 프로젝트의 좌표가 옮아갈 때, 기획은 어떻게 ‘그’ 자연과 ‘이’ 자연의 좌표점의 위상차에도 불구하고 한 줄로 이어 전시의 좌표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을까. 나아가 <두 개의 산> 전시에서 식물이 작품으로 호명되고 호출될 때, 애초에 리서치 프로젝트에서 ‘숲세권’이라는 용어와 함께 자연 환경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해 던졌던 질문이 거꾸로 기획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이 글에서 이 전시를 위해 진행된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눠 차례로 정리하며 앞선 질문들을 먹지 삼아 겹쳐 써보고자 한다.
“숲세권-관악산” 관악산은 누군가에게는 동네의 산책 코스로 여겨지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부동산 매매가에 영향을 주는 자연 상품이다. 컨템포로컬의 두 기획자 또한 관악산을 보며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관악산 인근에서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최성균에게 관악산은 개인적 서사와 경험담을 동반한 일종의 예술 산행 코스로도 제안될 수도 있지만, 아파트 키즈였던 윤주희에게 관악산은 쉽게 등반 할 마음을 먹기 힘든 높은 산이자, 어린 자녀를 둔 부모로서는 ‘숲유치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사교육의 소재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렇듯 산을 둘러싼 서로 다른 시선과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숲세권-관악산” 프로젝트는 ‘자연결핍’, ‘생태맹’이라는 세대적 현상을 기반으로 최근 부동산 용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숲세권’에 관해 다룬다. 산업화와 근대화는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이곳 서울에서 가속도로 달려왔다. 가속화된 서울은 발치에 채이는 작은 풀 하나도 모조리 아스팔트로 밀어내 버렸다. 아파트 키즈에게 필요한 것이 오히려 ‘자연’이 되는 상황이 닥치자, 자본주의는 자연 또한 상품화해 버린다. 도시 속에 자연을 인공적으로 주입해 결국 자연 또한 자본을 창출하는 자원으로 활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숲세권’이라는 신조어 또한 이런 맥락에서 생겨났다. ‘자연결핍’은 오히려 ‘상품-자연’이라는 기이한 오늘을 낳은 것이다. 지난 날, 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 자연은 사회, 정치, 경제적 가치에 따른 도구적 존재, 다시 말하면 자본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용도로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생각에 반대하고 물질 그 자체에 집중하며 그 생명성에 관한 논의가 지속되는 소위 사변적 전회가 이론뿐 아니라 동시대 예술가들의 창작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있다. 관악산을 바라보는 상이한 두 시선을 기획의 출발로 삼고, ‘산’을 매개로 동시대의 자연에 관해 연구하고자 한 기획 역시 인간중심적인 자연관을 재고하려는 태도로 읽힌다. 또한 “숲세권-관악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예술 산행’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고하기 위해 자연에 대해 그저 말하기 보다는 경험적, 현상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택한 방법으로 보인다.
“50일 간의 관악산” 해가 바뀌고 코로나19로 인한 감염병의 위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관악산을 함께 등반하고자 했던 처음의 기획에서 각자 집에 머무르며 반려 식물을 매칭 받아 기르는 실천으로 옮기게 된다. 기획팀은 “참여작가의 주거상황, 생활패턴, 취향, 생태지식, 니즈 등에 맞춰 식물 전문가가 개인 컨설팅하여” 반려식물을 결정하고, 각 작가들에게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거리는 가깝지만 더는 쉽게 찾아가기 힘들어진 관악산을 화분 하나에 투영하여 반려 식물 삼는 것으로 선회한 것이다. “숲세권-관악산” 리서치 프로젝트 과정에서 숲에 관한 자문을 해준 고대현 연구자는 “학교 풀밭에 100종이 넘는 식물이 있는데 식물 공부를 하겠다고 유아 숲교육 전문 업체에게 외주를 주어서 숲으로 가는 상황”을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식물종만의 생태와 생장을 배우기 위해 ‘숲체험’을 사교육화 하는 현실을 꼬집으며, 일상 속에서 식물과 함께 하면 그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인데 그것을 지식으로 분류하고 특화시키며 오히려 거리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 환경’에 대한 예술적 접근을 위해 지역과 장소를 특정하여 찾아가는 행사로 소모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에서 식물종과 생활을 함께하며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시간을 들이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에 칼라데아 뷰티스타(박주희), 돌나물(고사리), 벤자민 고무나무(김선희), 탈란드시아(조민아), 나도풍란(이지연), 파리지옥(최성균), 미스킴라일락(윤주희)를 화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반려 식물로 삼게 되었다. 어떤 작가는 자신들이 키우게 될 식물을 결정하기 위해 화훼 전문가와 상담을 하는 과정을 마치 “궁합 보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인간 종의 생리, 생활 방식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식물 종은 낯선 생리와 생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가들이 식물을 아무리 애지중지 키우고, 그 식물만의 생태 환경을 존중하려 해도, 일시적인 동거로 식물 종의 전부를 이해하고 서로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사리 작가는 “호기롭게 진행했으나…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틀째부터 죽어나갔다.”며 마음만큼 식물이 잘 자라지 않아 막연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반려 식물’이라는 이름으로 집에 데려온 생명들을 도리어 죽음으로 내모는 것 같아, ‘반려’라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곱씹어 보기도 한다. 그는 “반려(伴侶, 짝이 되는 동무)”와 “반려(反戾, 배반하여 돌아섬)” 그리고 “반려(叛戾, 도리에 어긋남)”을 가만히 적어 보며, 자신의 ‘반려’를 성찰하고 식물에게 고개 숙여 깊이 사죄하기도 한다. 박주희 작가는 환절기를 맞이하면서 문득 자신의 반려 식물(칼라데아 뷰티스타)이 “인위적인 난방의 고온과 자연 상태의 고온을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기도 한다. 고사리 작가는 돌나물의 연약한 줄기를 염려하며 “내가 하늘을 향해 심어 (땅을 타고 자라야 하는데 오히려) 힘겹게 솟구치고 있는건 아닌지, 그의 생의 관여(關與)일지 간여(干與)일지” 자문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점점 식물 스스로 생장하는 생명력을 확인하고 감탄하는 순간들이 많아지며, 이지연 작가는 결국 “반려나 돌봄이라는 말보다는 그저 옮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술회하기도 한다. 최성균 작가는 죽은 줄만 알았던 파리지옥에게서 연한 녹색 싹이 새로 돋아나는 것을 지켜보며,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박주희 작가의 말대로 “식물의 생장을 지켜보는 일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시간”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식물은 이미 인간의 생활 패턴과 습성, 생물학적 연령에 기초한 생애주기에 맞춰 자원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식물을 통해 자연을 환기하려 한다해도, 이미 식물은 인간과 생태계를 공유하기에 적합하도록 문화화, 사회화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화, 사회라는 것 또한 인간 혼자서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다. 인간 외의 생명 종들, 지리, 기후와 같은 여러 작용들이 함께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비인간 생명종, 자연 환경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이미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인간은 우리가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비인간성이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 비해 더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론가는 주장한다. **“인간이 환경의 모든 귀퉁이에서 기어왔다는 것을, 그곳에 스스로를 은닉했다는 것을 인정하라. 당신이 좋든 싫든 당신과 뗄 수 없이 뒤얽혀 있는, 당신이 평생 연루되어야 할 다루기 어려운 관계물과 함께하기에, 환경이 실제로 인간의 신체와 마음 내부에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세심한 관용을 베풀며 일상생활 속에서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과학적으로 당신 안에서 전진하고 있음을 인정하라.”우리가 직접 식물을 키우며 그 생장을 함께하고, 돌나물을 섭취하고, 파리를 잡아 먹이로 주더라도, 우리는 결코 식물 자신의 일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식물을 분양 받은 작가들이 담담히 증언하듯이, 세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식물을 대하는 일이란, 결국 낯선 종, 낯선 삶들의 이름, 습성, 생장 조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관심과 이해를 갖고 다가서는 일일 것이다. “두 개의 산” 두 번의 사전 프로그램을 마치고 프로젝트는 전시 <두 개의 산>으로 갈무리되기에 이른다. “숲세권-관악산”을 통해 결국 자연 환경이 인간 문화의 토대로서 정의된다는 지점을 관악산을 매개로 다시 보고, “50일 간의 관악산”을 통해서는 반려 식물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침투된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섬세한 관심과 이해의 문을 열어두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개념으로서 ‘물질성’으로 환원되기에 이른다. 인간 또한 복합적이고 복잡한 여러 요인들로 구성된 물질적 배열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공원의 비둘기마저도 물질적 구성물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계급화하고 서열화하여 그 가치를 자본주의적 도구로서 환원시키던 태도에서부터, 인간 또한 생물, 무생물 사이에서 수평적으로 존재하는 물질과 다름 아님을 직시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캔버스 내부 세계는 수평적인 관계들로 서로가 서로에게 이입되고 연결되는 동시에 캔버스 바깥으로도 서로 다른 장면들이 실뜨기 하듯 엮어진다.(조민아)
“50일간의 관악산”으로 식물을 기르게 된 경험에서 파생된 작업들(고사리, 박주희, 이지연)은 유사한 모티브와 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은 각각 반려 식물이라는 출발선으로부터 각자 다른 중력으로 회전한 궤도를 드러내고 있다. 세 작가 모두 식물을 기르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생태 지식, 생장 조건을 작업의 지지대로 삼았고, 동시에 식물과 함께 하면서 시작된 작가의 감수성의 변화를 예민하게 건져내고, 그러한 감정을 마주하고 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가진 녹색 생명체로서 숲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끼에 문화화된 자연의 현 상태를 대입시키기 위해, 스마트 팜이라는 구조물을 통해 이끼의 생장 특징을 반영한 기계식 농장을 전시장에 구현한 경우(이지연)는 원형 기계에 설치한 연탄들에게 뿌리를 내린 이끼의 생장을 돕기 위해 구조물을 끊임없이 회전시키고 가습기로 수분을 공급해준다. 이것은 이끼의 생장 조건을 반영하고 최적화한 시스템을 적용시켜 생물과 그 생장 과정을 작품으로 구현한 것이다. 전시장 1층에는 소규모의 실내 정원이 등장한다.(박주희) 칼라데아 뷰티스타를 반려 식물로 삼게 된 이후 시작된 식물에 관한 관심이 다른 식물종으로도 이어지고, 식용으로 소비하거나, 싹이 나면 쉽게 버려졌던 구황 작물 따위에도 시선을 보내며 다양한 식물들과 ‘반려’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난 50일 간의 경험은 전시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지속된다.
그렇다면 식물 종이 전시장으로 들어서게 될 때, 식물은 단지 예술가의 사변적 소재로만 다뤄져야 할까. 지난 예술 역사에서 인간은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물질의 특성을 부여하거나 혹은 걷어내고, 다양한 물질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 내리거나 해체하고자 시도했지만, 물질 그 자체에 접속하지는 못했다. 물질은 부차적 존재, 인간 외의 개체로서 예술적 소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예술의 미디어로만 소비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하고 실재하는 생명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시에 등장한 식물이 하나의 생명이자 물질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던 게 아니라면, 작가들이 직접 관악산으로 들어가고, 식물을 집으로 들이며, 식물종의 생태를 식별하고 구분할 정도의 생태적 지식을 쌓고자 시간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시에 작품으로 동원된 식물들을 통해 생물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에 대한 질문까지도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생물 미디어와 우리가 어떻게 예술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고민하기 위해, 기획팀과 참여 작가들은 시간을 두고 신중한 물질적 관계를 형성해왔다. 그래서 일까, 이 전시에서 식물의 생장 과정을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반려자로서 관찰 일지를 작성한 작품(고사리) 앞에 더욱 시선이 머무른다. ***“창작자와 창작물이 시간을 두고 신중한 물질적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돌봄과 배려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 이 결국 이 전시를 위해 지난 2년여의 시간 동안 해온 일들이다. 인간 또한 그저 물질적 배열이라면, 내 팔꿈치와 소매에 살고 있을 수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들, 비둘기의 날갯짓에 흩날릴 병원균, 끊임 없이 배출 되는 탄소화합물, 옷감을 구성하는 직물과 연탄에 자리 잡은 이끼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지표면의 불안정성, 거센 태풍, 지각 변동 등 언제든지 ‘변화’가 예정된 불확실한 세계 위에 서 있는 인간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XYZ라는 축 또한 여러 방향으로 서 있는 무수한 거울 중 하나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며, 어제와 오늘은 엉겨 붙어 있는 기생충처럼 뒤얽힌 시간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정소영) “숲세권-관악산”을 통해 인간성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을 추구하는 것이 헛된 일이었음을 깨달았듯이, “50일 간의 관악산”은 자아를 순수한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고 말해준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기후위기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인간을 인간만이 아닌 것으로 감각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도대체 그러한 감각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다면 <두 개의 산> 전시를 위해 관악산과 반려 식물에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쓴 작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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