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섭(미술사, 광주영화비평지 ‘씬1980’편집장)
박주희 개인전 <옥순의 실>  2021.10.7-12.5, 시민청 소리갤러리, 서울


박주희 작가의 작품에는 외할머니와 이모의 노동의 기억이 서려있다. 삼대에 걸친 여성들의 손의 놀림으로 자신과 가족을 일구어온 습속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서른을 넘긴 여성 작가에게 손의 놀림을 이용한 미술작업은 고단하기만 하다. 고단함을 보상해줄 미학적 성취는커녕 직업적 성취로도 지역의 여성작가로써 삶은 위태롭기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은 수시로 다른 일들을 찾아나선다. 미술대학을 졸업했어도 작업실도 전시의 장도 쉽사리 허용되지 않은 십여년동안 공공예술기관에서, 디자인회사에서, 어쩌다 한 번씩 들어오는 드로잉 알바로, 정부가 선심쓰듯 내뱉는 마을벽화일 등 손을 써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도 오로지 미술작업에만 몰두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2015년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외할머니의 삶은 단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100년전 태어난 외할머니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지 않고 바로 곁의 이모와 엄마의 삶도 다르지 않은 현실에서 작가에게 씌워진 ‘여성’, ‘작가’로써의 정체성은 갈수록 난관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을테니 말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외할머니의 삶은 산 너머 예술이라고, 첩첩산중의 삶과 예술의 길이라고 인식의 뜨임을 할머니에게서 받았다고 봐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땅의 거의 모든 여성/작가의 삶의 주름의 궤적과 같은 것일게다.
작가의 그간의 <떨어지는 새>(2015, pen on paper), <오지 않는 봄>(2016,pen on paper) 등의 식물과 꽃과 새와 곤충 들의 공감각이 사라져버린 화면배치는 작가의 심리 어딘가에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실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충동이 자리잡고 있음을 추정케한다. 또한 작품제목과 달리 명도가 짙은 채색은 그것이 작가라는 정체성의 외피와 달리 그것들을 구성하는 질료는 무척이나 험난한 과정임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번 서울시민청 갤러리의 전시 구성도 외할머니가 남긴 유품인 명주실로 만든 금줄이 곳곳에 둘러쳐져 있는 것 역시 일상의 리듬과 다른 전시장이란 공간역시 이곳과 저곳, 즉 숭고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무의미한 경계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작품 역시 기존의 회화나 태피스트리가 아닌 영상작품인데 특기할 점은 <옥순의실>을 제외하곤 클로즈업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점이다. 외할머니를 카메라로 쫒는 와중 발견한 깨진 자기 뭉치들을 하나씩 조립하는 손, 뒷모습만 클로즈업된 검은 머리, 노랑 머리를 가진 여인의 머리를 땋는 손, 할머니가 남긴 명주실을 무한으로(애초엔) 둥그렇게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손 들이 그것이다. 실상 시공간을 보여주는 롱쇼트가 아닌 클로즈업은 이미 그 자체로 시간의 분절과 확장이다. 기계장치인 카메라의 시각에서조차 굳이 현실의 공감각을 재현하지 않으려는 작가에게는 분명 이 곳의 현실이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의 세계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클로즈업 밖의 세계의 위협과 상처를 금줄로 차단해보지만 쉽사리 허용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한 내적 전략은 아닐까.
서른이 넘은 작가에게 그 세계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평생 손으로 살아온 내력이 하나의 완성된 세계가 아닌 여성으로써 엄마로써 누군가에 의해 오직 분절과 단절로만 이루어진 파편화된 세계라는 폭로가 아닐까. 폭로의 불길함을 정화하고 여성/작가로써 그들의 내력을 잇겠다는, 그래서 나는 박주희라는 작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자리겠다는 생각이다. 여지껏 두 손 으로 직접 일군 작품들로 말이다.
지난 세기와 그 지난 세기 훨씬 이전부터 여성들의 가출(家出)은 상시로 벌어지는 재난이었다. 당연하게 여성들의 가출은 자발적인 것이 아닌 외부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에도 그것은 문제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귀한 혈족의 가문의 여성이라도 O씨 부인으로만 이름 없이 남자들의 묘비명 옆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지난 세기의 여자였다. 그러한 사정이었으니 가출따윈 당연한 것이었고 여성들은 상시로 재난의 공포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전쟁에선 승전국의 전리품으로 상납하기 위해 여성들의 공출(供出)은 필수였고, 질병과 기아의 시절엔 재앙을 몰고 온 역귀를 물리친다는 주술 때문에 인신공양으로 바쳐졌다. 그러한 공은 모두 국가를 보위하거나 부계 혈족의 대물림으로 지탱해온 가족을 잇기 위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희생이었다.
그러기에 당연한 일에 바쳐진 여성들이 딱히 어떤 공로나 댓가를 보상받는다는 것은 만무한 일이었다. 녹이 쓴 왕조시대 화냥년부터 일제강점기 종군위안부까지 분명 적국에 끌려가 살아 돌아왔음에도 그녀들에게 씌워진 굴레는 ‘더러운 년’이라는 모욕이었다. 모욕의 주체가 누구인가? 모욕의 담론을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자신들의 실패와 굴욕을 감추고 그녀들을 집밖으로 내 몬 남자들이었고 국가였다.
여성들의 가출은 근대화가 이식되고 산업화가 속도를 내면서 더욱 복잡해졌지만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 세기 초 나라가 망하고 바다 건너 이국에서 들어온 여성들의 삶과 지위에 대한 이론들은 여성들을 자발적으로 집밖을 나가게 했다. 정확하게는 그런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무런 경제력이 없는 여성들이 집 밖을 나간다는 것은 거리를 떠돌다 굶어죽을 것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집안의 경제권도 분할 받을 수 없고 집밖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가출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여성독립은 경제권이 우선시 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간 노라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혜석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지만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성장하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여성들의 값싼 노동력은 훨씬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표적이 되었다. 그녀들은 누에에서 실을 뽑아내는 잠사(蠶絲)공장과 섬유를 가공해 실을 뽑아내는 방적(紡績), 실로 천을 만들어내는 방직(紡織)공장으로 들어갔다. 이제 열 세 넷 밖에 안되는 여성들은 기숙사라 불릴 수도 없는 감옥같은 곳에서 일을 하면서 커피 한 잔 값도 안되는 임금에 만족해야 했다.
실상 교육열, 특히 여성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지 않았던 시절 근대시설인 공장의 취업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실과 천을 만들어내는 공장들은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근로환경이 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3-4살 소녀들이 감당할 노동의 무게치곤 너무 가혹했다. 그래도 집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에 아무 여성이나 들어갈 수 도 없었다.
1927년 일제강점기 여성운동 조직들의 연합체였던 근우회는 편물(編物)강습회를 열었다. 편물은 뜨개질을 지칭하는 말로 재봉기술과 함께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위한 생계수단이자 운동이었다. 실과 여성들의 질기고 질긴 인연은 수렵채집 시대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가출이 반드시 독립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의 여성들은 아버지의 노름빚과 남자 형제들의 생계와 학업을 위해 대다수 공장으로 편물강습회로 몰려갔다고 하는 게 정직한 진술일 것이다.
실상 그녀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외거노비(外居奴婢)였을 뿐이다. 집밖을 나가는 그녀들은 30년대 ‘신여성’, 50년대 ‘아프레-걸’. 6-70년대 공순이, 90년대 오피스레이디 등으로 혐오와 멸시의 객체로 대상화되는 외거노비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혼인이라도 해 집안으로 들어오면 돈도 벌고 가족도 공양해야 하는 솔거노비(率居奴婢)가 되는 것이고. 그러니 지난세기에나 지금 21세기에나 여성들의 가출이 재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박주희의 <옥순의실>은 이 모든 여성들의 가출의 통증이 깊이 패인 주름골마다 박혀져 있는 세기를 응시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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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섬주섬 옷을 입는 외할머니의 움직임으로 <옥순의실>은 시작한다. 미사보를 쓴 집밖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외할머니의 몸은 2년이 지나면 100살이 된다. 불편한 몸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커피를 마신다. 열 네 살 답동성당에서 허드렛 일을 하며 산 그녀는 수녀님이 타준 커피를 신부님께 열 시와 네 시 갖다드리는 심부름을 하며 커피 마시는 걸 배운다.<커피>
참기름을 담아 파는 소주병을 그녀는 깨끗이 씻는다. 이제 모두 집에서 밥을 안 해먹어 참기름이 팔리지 않는다면서도 그녀는 정성스레 소주병, 기름병을 씻는다. 오수에 빠져든 그녀를 쳐다보는 카메라. <참기름>
춘자가 그녀의 이름이다. 봄 춘(春)자에 아들 자(子), 일본말로 사이야 에모도. 태어난 해가 다이쇼(大正)7년, 1918년이라고 말하는 옥순, 아니 춘자. 도망간 아비와 재가한 어미가 병들어 죽자 그녀는 외삼촌의 구박을 피해 집밖으로 도망친다. 오갈 데가 없어 답동성당으로 흘러들고 학교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라 오지상 오도상을 배운다. 수녀님 침대 옆에 쪼그라들어 잠을 자며 수녀가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부모 없고 배운 것이 없어 수녀가 되지 못한다. 돈을 벌수 있다는 말에 중국 방적공장으로 알고 가지만 오사카였고 어디든 돈을 벌 수 있겠지 생각에 유리공장을 다니며 돈을 번다.
조선말이 서툴어지고 일본말이 익숙해질 무렵 해방이 되어버리고 조선사람들은 나가란 말에 반강제로 귀국한다. 귀국해선 한글도 한국말고 익숙치 않고 조그만한 체구의 그녀는 ‘닛뽄징’이라 멸시받으며 직업을 구하기 힘들어진다. 당시로선 늦어진 나이라 재취(再娶) 상대로 결혼을 해 단박에(?) 아들을 낳은 덕분에 내리 딸 셋을 낳고도 버틴다. 남편이 8대독자라 평생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길바닥에 재봉틀을 놓고 바느질로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 전쟁 통에도 재봉틀을 마당에 묻고 돌아온 그녀는 재봉틀이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  기찻길에 주인도 없어 보이는 강아지가 맴돌고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 뒤로 소독차 연기가 지나간다. <옥순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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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7년생이라고 말하는 춘자/옥순은 해방이 되면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성당에서조차 나와야 되는 상황에 “혼자, 혼자 깨달아야 하니까 이리 저리 몰래 구석진 곳까지 다니”며 세상을 알아야 하는 그녀에게 해방은 실직의 고통만을 주었다. 실직의 고통에 더해 제 나라라고 귀국한 해방조선에선 어눌한 한국말 때문에 ‘닛뽄징’이란 모욕에 직장도 전철을 타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춘자, 옥순, 사이야 애모도 에게 집과 나라는 어떤 안전장치도 보호막도 되어주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를 거두어준 성당의 블란서계 수녀를 따라 조선밖으로 나가려고 큰 배를 타던 날 생리가 시작되며 그게 죽을병인줄 알고 배에서 내리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누구도 그녀에게 여성을 세상을 알려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열 네 살부터 아무도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집에서 나와 성당에서 살았고 나라가 망했기에 만주와 중국을 거쳐 일본에 갔다. 해방이 되어 일자리도 잃고 쫒겨나듯 돌아온 나라에선 길바닥에 앉아 재봉틀을 돌리며 가족들을 건사했지만 누구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박주희 작가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할머니의 삶을 기록하게 된 것은 2015년부터이다. 무려 7년이 되는 시간동안 할머니의 구술을 기록하고 정리하며 하나씩 하나씩 작품을 매만져왔다. 처음 작가는 옥순이라 불리던 외할머니 그녀에게 다른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카메라로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가족 누구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그녀의 두 개의 이름은 그녀의 인생뿐 아니라 20세기 한국현대사의 여성들의 가출과 재난의 역사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먼저 그 여성들의 역사란 것은 조선 후기『심청전』으로부터 연원해 채만식과 윤이상, 최인훈과 황석영, 그리고 김윤식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과 사회사의 본령을 심청이로 파악하려는 서사적 맥락에 닿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의도했다고 볼 수 없으나 오롯이 할머니 100년의 역사를 쫒다보니 드러난 그녀의 역사는 심청의 역사이다.
춘자/옥순의 서사에는 여전히 심청처럼 눈먼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빠지고 저 먼 대국에서 육신을 팔다 전쟁이 끝나자 쫓겨나듯 들어오지만 무능한 남편에게 막걸리를 봉양하고 바느질로 가족들을 일구어야 한다. 사이사이 박주희 작가가 할머니의 증언속에 끼워넣은 6-70년대 여공들의 푸티지 필름 등은 작가역시 할머니의 개인사가 현대사의 맥락과 심상치 않음을 확신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작품을 한국현대사의 전형성으로 포장하거나 과장하려 하지 않는다. 작품의 말미 “스물아홉에 결혼하고 남편이 서른 하나 였어” 라는 아무런 예술적 인위성이나 기교를 넣지 않는 일상의 말로 끝맺음을 한 것이 작가의 큰 미덕이다. 그것은 할머니의 개인사는 나와 나의 가족의 개인사이기도 하다는 점, 할머니가 아닌 춘자/옥순의 역사로만 해석되고 평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럼으로써 거꾸로 할머니와 같은 수많은 심청의 이름들이 더 큰 역사로 용해되고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경계심이다.
그래서 <옥순의실>이 상영되는 공간을 할머니가 남긴 명주실에 고추, 숯, 솔가지, 한지 등으로 금줄을 치고 놋그릇을 경건한 제스추어로 씻는 행위를 통해 의례적 공간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카메라와 할머니, 기계장치와 샤머니즘(애니미즘), 역사와 일상이 조응하도록 한다.
의례적 공간과 카메라의 스크린은 이 곳이 나의 할머니이자 수많은 심청이들이 거쳐간 역사임을 환기시키고 그녀들의 주름진 골골마다 패여 있는 재난과 수난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응시하고 있음을-응시해야 한다는-주문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고 여전히 인당수에 갇혀 눈먼 아비를 구했다는 효의 이데올로기로 덕지덕지 칠해진 심청의 재난과 역경의 서사를 위한 의례는 아니다. 오히혀 부계 혈통의 최상위자인 눈먼 아비의 눈을 틔움으로써 효녀로 등극하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잔치에 오지도 못한 세상의 모든 맹인들을 구원하는 심청이의 구원이 소수자를 향하고 있음을 환기하는 의례이다.
이는 외할머니가 예전에 살던 부개동의 기찻길에서 우연히 버려진 유리와 사기조각 작가가 정성스럽게 이어붙이는  <부개동에서 수집한 다섯 개의 잔>(2015)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은 사기조각들을 주어 온 외할머니의 개인사와 같은 복고풍의 속화(俗畵)류의 그림들을 맞춰가는 작가에게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현재와 교차하고 중첩되며 다종다양한 의미들을 파생시킨다. 작가가 직면한 경제적 궁핍과 예술씬에서의 외로움이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완벽하게 붙여지지 않는 깨진 사기조각처럼 할머니의 역사도 나의 앞으로의 역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모두가 다 아는 심청이와 같은 이야기로 나의 작품도 함몰되지 않을까? 그게 좋지 못한 일일까?
할머니의 유품인 명주실로 머리를 묶는 뒷모습은 그래서 처연하다. 범피중류(泛彼中流), 뱃머리에 올라 망망대해로 뛰어드는 심청의 뒷모습이다. 할머니의 100년의 삶을 만나 세계와 대면하는 작가의 뒷모습이다. 풍덩!
집밖을 돌고 돌아 한참이나 지나 돌아온 집에서 연화보살이 된 심청이(최인훈) 깨진 거울을 보며 웃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혼자 깨달기 위해 여기저기 구석으로 댕기면서 알았어’라고 말한 춘자/옥순은 어떻게 웃었을까? 가족을 먹여살린 할머니의 실과 자신의 (예술)노동을 교차하는 작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직이다. 아직도 집을 나온 여자들에게 가혹한 21세기 한국에 사는 여성들의 이름은 춘자도 옥순도 주희도 모두 심청으로 불리워도 이상치 않다. 할머니, 춘자/옥순이라는 개인사를 통해 가출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여성들의 재난을 어떤 수식도 과장도 하지 않고 담담히 기록하고 그러 모으는 작가가 세계와의 대결에서 언제쯤이나 안위(安危)를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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