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희 개인전 <옥순의 방> 
지금 다시 기록되는 시간

글 신재훈(극단 작은방 연출가)

손녀 박주희의 시선은 카메라의 시점으로 옮겨가 할머니를 살핀다. 마치 처음 본 물건을 살피는 것처럼 할머니 최옥순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람. 작가 박주희는 자신의 할머니를 첫 전시의 오브제로 삼는다. 
곰탕은 끓고, 이불은 햇볕에 말라간다. 아흔여덟 살, 삶의 주름은 깊고 깊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 산만 바라본다. 일곱 살 때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뱉어내는지도 모르고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에게 국을 먹이고 먹였단다. 신부님이 남긴 커피를 종종 마시곤 했는데 지금은 커피가 제일 맛있단다. 참기름을 짜서 팔아보지만,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사람이 없어 잘 팔리지 않는다. 시집가서 처음 본 남편은 귀하게 자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병신같이 가만히 있었단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담긴 영상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박주희는 옥순을 기록하면서 마치 음식을 되새김질하듯이, 의미를 발견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아, 나의 할머니는 이런 점이 있었구나. 내가 봤던, 들었던 것들에는 이런 의미가 있구나. 과거에 살았던 집을 다시 찾아보기도 하고, 언젠가 멈출지도 모를 재봉틀의 쓸모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확인한다. 피붙이기에 새로울 것이 없을 수도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작가 박주희에게 다시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탕을 끓이고 이불을 햇볕에 말리는 것을 지금 여기서 다시 꺼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박주희는 작가 노트에서 작업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생각한 것은 할머니가 '옥순'과 '춘자'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할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무수하고도 사소한 이야기들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기록해야겠다는 막연한 다짐이 들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만 같던 할머니의 이야기 안에서 나와 맞닿아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었다. 할머니와 나눈 이야기들은 그렇게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할머니의 연연하지 않는 성격처럼 사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두터운 밀물처럼 다가오기도 하였다. 촬영하는 내내 어린 할머니와 내가 아는 나의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반복되었다.”
내가 알고 있던 할머니에게 모르던 사실이 있었다. 바로 이름이 두 개라는 것이다. 할머니의 이름이 두 개인 이유는 추측하건대 일제강점기 때 쓰던 이름과 그 이후의 이름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 취급을 받아 전차에서 내쫓기듯 들려 내려졌던 그 머나먼 과거, 일본말을 섞어 쓴다고 일자리를 잃었던 이야기는 저 작디작은 아흔여덟 살의 삶에 역사의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소소한 일상으로 다가왔던 할머니에게 그동안 생각지 못한 역사의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 새로웠을까? 그래서 그냥 넘겼을 일상의 말들이 아득한 뿌리를 숨긴 말들로 다시 다가왔고, 그래서 다시 의미를 찾아야 할 말로 작가에게 마주 다가온 것이 아닐까? 할머니를 기록해야 할 ‘막연한’ 다짐은 입구만 있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속을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었으며,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궁금증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이미 알았을지도 모를 이야기, 누군가의 삶과 비슷할지도 모를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지금을 사는 작가의 삶과 포개어진다. 아, 이것은 나와 다를 것이 없구나. 아, 이것은 나와 많이 다르구나. 어쩌면 할머니의 삶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 이번 작업의 가장 큰 의미였을 것이다. 관심의 대상 밖에 있던 것을 이름 붙여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의미가 되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기록한다. 전시장 한쪽에 깨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붙여 다시 본래의 작은 컵을 만들었듯이 기억은 다시 기록되어 새롭게 구성된다. 조각을 다시 맞추며 그림을 다시 확인하고 그 배열을 다시 새기는 것은 이미 있던 것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맘에 새기는 작업이다. 그래서 전시장에 걸린, 할머니가 손수 만든 이불은 애틋하게 다가왔다. 몸을 덮을 용도로 만들어진 이불은 삶의 무게로, 혹은 지난 시간의 아득함으로 다시 새겨진다. 삐툴삐툴하게 지나갔을 재봉선은 할머니의 호흡으로 다시 살아나고 그 숨으로 키워냈을 작가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가 보낸 시간을 지나 손녀인 작가에게 이르는 아득함 시간으로 여겨져 경이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작가 박주희는 할머니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으로 첫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참으로 겸손하고 애틋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지금을 생각하는 작가의 시선은 할머니를 다시 찬찬히 바라보듯 느리고 신중하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내가 서 있는 주변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고, 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진실을 발견하는 작가만의 시선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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